'6줄
위에 흘려보낸 30년, 후회는 없어'
김대중
이라니 깜짝 놀라겠지만 재밌게도 그분의 이름이 김대중 이었다. 7080세대라고
해야 할까? 학번으로 세대를 분류하는 대중문화가 그에겐 조금 껄끄러웠지만
그도 통기타에 청바지 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곤 소위 취업이란 것을 하였다. 기계공고를 졸업하였으니 고만고만한
공장에 입사해서 일을 배우다 때가 되자 군에 입대를 했다. 강원도 최 전방에서
군생활을 하던 그는 말년병장시절 후임 병사가
들려 주는 기타 소리에 매료되었다. 그걸
배워보려고 무진 애를 쓰긴했으나 이미 갈참이 되어 버린 그는 그 꿈을
이루지못하고 개구리복을 입게 되었단다.
그시절
어찌 자신 뿐이었겠냐만 그 역시 군생활 때가 더 편하고 잘 먹었다고 할 만큼 생활고는
팍팍했다고한다. 별 수 없이 취직을 위해 공장을 찾아 다니었는데 눈에 번쩍 띄는 구인광고를
접하게 된다. '기타공장'이 바로 그것이었다.
사람이 직업을 갖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보람이라
말하겠지만 모두에게 자신의 일이 즐거운 것은 전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밤잠을 못이룰 만큼 심장이 뛰었다고 그 때를 회상한다.
그
아름다운 소리의 연주자가 되는 길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 소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왠지 자신이 갈망하던 정말 하고싶은 일이란 직감에서였다.
그로부터
참 여러 공장을 전전하며 기타 제작에 대한 모든 공정을 자기것으로
만들 게 된다. 당시는 세계적인 기타 브랜드들이 임금이 비교적 저렴하고
손 재주가 좋은 한국의 노동시장을 휩쓸고 있을 때라 고급 기술을 익히는
데는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 후 세계경제도 많이 변했다. 고교시절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마이카 시대가 현실로 다가왔고 공장 노동자들의 임금도 올라갔으나
그것은 잠깐 좋은 시절이었고 그가 다니던 공장들은 중국으로 옮기거나
문을 닫고 수입상으로 바뀌게 된다.
그
어렵게 배운 기술이 참 맹랑한 기로에 서게 되었다고한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처자식이 달린 가정을 꾸려야 하는 가장의 입장에서 배운 것은
기타 만드는 재주 뿐인데... 장고 끝에 지인의 소개로 중국에 공장을
둔 기타 제조업체의
기술 고문으로 한국을 떠나 직장을 잡게되었다.
먹고
사는데는 지장 없는 수입이었지만. 처자식과 떨어져 사는 것도 그렇고 뭔가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한다.
나도
브랜드를 갖고 기타를 만들고 싶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나도 내 브랜드의 기타를 제작하겠다는 야심찬 희망을
품게 된다. '그래 당장은 어렵겠지만 길은 그것밖에 없어...' 결심을
한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귀국을하고 소위 공장이란 것을 차렸다.
마침 종로에 오프매장을 가지고 있는 지인을 만나
브랜드를 정하고 사업자등록도 마쳤다.
기타를
잘 만드는 것은 자신있었다. 그런데 막상 오너가 되어보니 만드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마구 밀려들어오는 중국산 저가 제품들 어디 중국
뿐이랴 한국에서 인지도를 올린 유명 메이커들은 정말 염치없을 만큼
노동자 임금이 싼 나라로 경쟁적으로 옮겨 다니며 국내 수제 기타 장인들의
설 자리를 위협해왔다.평생 경영이란 것을 해본 경험이 없는 그에게
사람을 다루는 기술은 또 다른 공부였고 그것은 경제적으로도 심적으로도
벌린 일을 작파하고 싶을 정도로 궁지에 몰리게 되는 뼈저린 경험을
하게되는 인생공부였다. 돈에 속고 사람에 속고, 그것은 남의 밑에서
일하고 주는 돈 받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고난의 길이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건 진정한 좋은소리에 대한 집념은 결국 그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게 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인터넷에서
맺은 인연, 7080 웹마스터 몽샘을 만나다.
통기타쇼핑몰-ucchouse
http://ucchouse.kr
http://badaga.co.kr
http://cafe.daum.net/mong1
그렇게
지지부진하게 세월을 까먹고 있던 시절 그에게 기회가 왔다.
국민의
정부 시절 IT기반에 대한 육성은 그에게도 행운을 만나게하는 단초가
된다. 세계적으로도 최고인 우리나라의 인터넷망은 모든 산업에 깊숙히
영향을 끼쳤고 당시는 네이버 야후 엠파스 다음등의 포털들이 서로 양질의
컨텐츠를 보유하기위해 물밑 각축전을 벌이던 시절이었다고한다.
이
때 그는 다음카페에서 통기타 강좌를 개설해서 수만명의 회원을 유치하고
있던 '몽블랑통기타의 몽샘'이란 사람과 인연을 맞게 된다. 몽블랑통기타는
통기타 단일강좌로는 국내 최대회원을 보유한 사이트로 유명한데 때마침
사이트 운영자는 수제기타를 만드는 장인을 찾고 있었고
몽블랑통기타도 회원들에게 믿을 만한 악기를
권해야 하는 일들이 자주 있었던터라 이 두사람의 의기투합은 날개를
달 게 되었다. 몽블랑통기타에서 내건 슬로건은 간단했다. 기타를 구입하면 가르쳐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국내
인터넷 기반은 한층 더 발전하여 포털마다 양질의 동영상을 보유하기
위한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다음카페 '몽블랑통기타'의 UCC동영상을 통한 기타의
브랜드 진입 광고는 적중했다. 원하는
정보를 찾기위해 웹서핑을 할 때는 키워드라는 것이 있다. 카페 운영자인
몽샘은 '통기타배우기'란
키워드를 사용했는데 거의 1년동안 동영상 검색에서 그 키워드를 독점해서
사용했다고하니 지금 생각하면 참 격세지감이다. '몽샘' 그도 역시 7080세대였다.
위에 열거된 홈페이지를 서핑하면서 느낀 바는 젊다는 것은 나이로 보는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긴 상념에 빠지게했다. 통기타강사이면서
웹마스터,웹디자인,나레이터,비디오촬영,카피라이터 그 작업을 혼자해낸
멀티 맨, 우리들의 젊은 아버지라 해야 할까?
"그건
저희가 착해서가 아닙니다."
하여간
그리하여 소위 듣보잡이던 그의 브랜드는 많은 통기타 애호가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몽블랑통기타는 그의 절친한 사업파트너에게 '몽블랑'이란 독립브랜드로 OEM생산을
맡기게 되고 그것은 또다른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제 장인은
다시 만드는데만 열중 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그렇게
몽블랑 통기타는 투톱 체제로 각각 오프라인과와 온라인에
대한 역할 분담이 되었다. 몽블랑은 온라인 고객의 마음을 사기 위한 방법도 각별한데, 이제는
악기를 사려면 낙원상가를 찾아야 당연하다는 생각은 많이 변해서 고객들은
오히려 인터넷 서핑으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구매를 하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인터넷 판매는 반드시 택배사를 거쳐야 되고 운송중에
파손이라는 위험 부담은 고객들의 구매욕을 망설이게 만드는 큰 부담이
되었다. 그 불안을 해소시키기위한 방편으로 사업파트너인 몽블랑통기타는
만약 택배사고로 제품이 손생 되었을 때는 누구의 과실을 따지기 전에
무조건 새 제품으로 다시 보내 준다는 약속을 하자고 명장 김대중씨에게
제의 하였고 그는 선뜻 받아들였다고한다.
하기사 새것을 구입한
사람이 줄감개 같은 작은 부품 하나라도 망가진 것을 고쳐서 돌려 주면 좋아할리
만무이긴 하나. 실제 사고가 나면 책임소재를 가리느라 짜증이 나는
상황이 왕왕 벌어지는 풍토에서 신선한 발상으로 받아들여진다. 기자가
참 대단한
발상이라고 추켜세우니 돌아오는 대답이 참 담백했다.
'저희가
정직해서라기보다 결국은 우리의 사업을 위해서지요...' 나날이 인터넷
상에서의 구매행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시점에서 모든 판매자에게
한번쯤 일깨워 주고 싶은 말이란 생각이 들었다.
완성된
통기타 안을 들여다보면 몽블랑통기타의 로고와 김대중 명장의 낙관이
상표에 나란히 빨간 색으로 새겨져있다. 고객에게 공동 책임을
지자는 결의이고 그래서 한몸이라는 것이다.
지난
인고의 세월을 회상하며 장인 김대중씨는 담담히 이야기를 한다. 잘
만들기만 하면 잘 팔릴 줄 알았는데. 역시 받은 재주를 가장 의미있게
사용하는 것이 보기에도 아름답고 일도 쉽게 풀리는 것 같다고.... '몽샘이
그걸 달란트라고 합니다'
이제
그 아들이 대를 잇겠다고하니 부러울 게 없어
그에게는
군에 가있는 아들이 있다. 천직으로 알고 30년여년을 버텨온 인연을
만들어준 군생활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제 그만큼 장성한 아들을
승용차에 태워 군에 보낼 때 아들이 한 말이 귓전에 생생하다.'아빠
내가 제대하면 대를 이을께!'
자식이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것, 정말 좋았댄다. 이정도면 반쯤은
성공한건가?
정말
만들어놓고 어찌할 바를 모르던 시절은 비켜갔지만 아직도 곳곳에 문제는
산적해있다고 한다. 제품이 좀 인지도가 올라가면 느닷없이 중국에서
엉터리 물건을 만들어 상표를 도용한 짝퉁이 들어오는가 하면 도무지
적정 가격을 알 수 없는 악기에대한 상인들의 도에 지나친 상술도 문제로
지적한다. 어떤 고객의 말이 그걸 대변해 주는데 150만원 달라는 기타를
깎아줘서 100만원에 구입했다고 한다. 기자가 듣기에도 참 듣기에도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었다. 부르는게 값이라더니...
기타는
그저 찍어내는 공산품이 아니라 제작자가 애정을 갖고 만드는 과정 과정마다
자기의 혼을 쏟는다. 혹자는 괜한소리라고 항변할지 모르나 제작과정의
그를 지켜보면 그 진지함에 딴지를 걸 생각이 쑥 들어갈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기사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재료값에 차이가 난다고 해도
별 수 없이 나무로 만드는 것인데 4만원짜리도있고 400만원짜리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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